음악교육신문

‘피아노는 산소와 같은 존재’

“사람은 죽어도 레코드는 남는다...”

“아쉬움은 남았지만 부산에서의 공연일정 때문에 26일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근데 그런 큰 일이 일어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저로선 정말 다행이긴 하지만 그 곳 현지민과 관광객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네요.”

부산에서 연주회를 마치고 막 서울에 도착한 피아니스트 서혜경이 기자와 만나자마자 동남아 지진해일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그럴만도한것이 서혜경이 부산 연주를 위해 태국에서 귀국한 당일 동남아 지진해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연주회를 위해 귀국해 참사를 면했다...?’ 역시 연주자로서의 삶이 그에겐 하늘이 준 천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아니스트 서혜경은 5세에 피아노를 시작, 예원학교 시절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엄격하고 보수적이여서 여자가 너무 잘나면 팔자가 사나워진다고 생각한 서씨의 아버지는 가까운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면 그가 금방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그 생각을 뒤엎고 서혜경은 이듬해 미국 메네스 음악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한데 이어 줄리아드 음악학교에 입학,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줄곧 줄리아드에서 수학했다.

8세 때부터 국내 콩쿠르를 석권하며 음악신동으로 주목받았고 미국무대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영 아티스트 콩쿠르, 쇼팽 콩쿠르, 쥴리아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메노그 국제 콩쿠르 등에서 차례로 입상했다. 1980년에는 부조니 국제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 피아니스트로 입상함으로써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대열에 합류했으며 대한민국 정부에서 수여한 보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이외도 수차례 권위있는 국제콩쿠르 수상과 함께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 이어졌다. 1985년에는 25세의 나이로 ‘윌리엄 퍼책상(링컨센터상)’을 받았으며 세계굴지의 매니지먼트회사인 ICM과 전속 계약을 맺어 화제를 모았다. 1988년 뉴욕에서 20명의 세계정상급 피아니스트들과 함께 연주회를 가진 바 있고 카네기홀이 선정한 올해의 3대 피아니스트 중 한명으로 특별 연주회를 갖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이렇듯 지금까지 20여년간 세계무대를 누빈 그의 화려한 연주경력에 비해 음반작업은 뜸했던 서혜경이 지난해 12월, 쇼팽과 리스트 에튀드 음반을 발매했다. 쇼팽 ‘12개의 연습곡 작품 25’와 리스트 ‘6개의 파가니니 대연습곡’을 모두 녹음한 것이다.

“예전에도 레코딩 작업에 대한 제의는 계속 들어왔었는데 그 때는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았어요. 수많은 연주무대를 가졌지만 음반작업은 충분한 연습 후에 하고 싶었죠. 사람은 죽어도 레코딩은 남는다잖아요. 하지만 이제는 음반을 낼 준비가 된 것 같아요. 20, 30대에는 에너지와 정열이 넘쳤지만 표현하고 싶은걸 다 표현하지 못했거든요. 지금은 피아노의 여러가지 음색과 선율을 자유자재로 컨트롤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자신합니다.”

그는 앞으로의 연주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내비치면서 ‘지금부터가 시작’이라는 굳은 결의를 보였다.

수많은 레퍼토리 중에서도 에튀드 작품을 녹음한 것이 궁금했다.

“쇼팽과 리스트 에튀드는 테크닉의 한도를 늘리면서 예술적인 향취가 높은 작품이라 할 수 있어요. 고도의 테크닉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작은 소품으로서의 음악적 표현을 담아내고자 했지요.”

그는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DVD도 함께 발매했는데, 쇼팽 연습곡 6, 10, 11, 12번과 리스트 파가니니 연습곡 중 두곡의 연주장면과 연주법 설명을 담았다고.

음반시장이 침체돼 있어 주위에서는 레코딩 작업을 만류했지만 이제 피아노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그는 앞으로 음반작업을 계속해 나갈 계획이다.

현재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전곡 녹음을 기획하고 있으며 무소르그스키와 스크랴빈 작품 등도 녹음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또 한국, 일본, 중국 등의 동양의 대표곡을 찾아 연주할 계획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피아노 연주시 가장 중시 여기는 것이 있다면 바로 ‘中庸’이라고 했다. 

“좀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저는 ‘중용’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중용’이라 하면 그냥 ‘가운데’ 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공자님은 중용을 지키기는 맨발로 칼날 위에 서기보다 어렵다고 하셨지요. 중용은 가운데나 평균치가 아니고 완벽한 조화를 의미합니다. 조화나 균형을 갖추지 못한 음악에서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고 감동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음악에서의 중용은 가장 아름다운 소리, 청중을 울릴 수 있는 적절한 음악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에게 항상 ‘먼저 음악을 즐겨라’고 강조한다는 서혜경은 “피아노는 체격조건, 음악환경 등이 고루 갖추어지지 않으면 대성하기가 힘들지만 자신의 환경이나 능력에 맞는 목표를 정해 꾸준히 밀고 나간다면 그만큼 즐거운 직업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피아노는 다양한 생각과 철학을 통해 무한한 우주를 그릴 수 있는 매력적인 악기에요. 그런 피아노는 저에게 산소와 같은 존재랍니다. 없으면 못살죠(웃음).”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서혜경은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 유럽, 한국, 중국 등 세계 각지에서 활발한 음악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경희대학교 교수로서 후진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김금화 기자/musicnews@music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