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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1-25 09:43
<시사평론> 1917~2017
 글쓴이 : 음악교육신문사
조회 : 222  
 

 

글:이건용 (작곡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올해 탄생 백주년의 맞는 두 작곡가의 얘기다
. 김순남. 서울 출생. 수재였다. 유복했다. 서울 태생 으로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다. 당시로 서는 웬만해서 꿈도 꿀 수 없는 유복함이었다. 공부 도 잘했다. 명문이었던 제일고보와 경성사범 두 곳 에 모두 합격했다고 한다. 그러나 작곡에 뜻을 둔 그 는 독학으로 공부를 하다가 본격적인 수업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작곡과 피아노를 전 공했다. 당시에 최신 경향이었던 무조성적 현대음 악 어법도 익혔다. 바르톡의 민족주의 경향에도 영 향을 받았다. 그가 남긴 피아노 협주곡의 어법을 보 면 그런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음악 뿐만 아니었다. 사회주의적 이상을 받아들여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방향을 정하기도 했다. 일본 작곡계에서도 주목을 받는 작곡가가 되어 <일본현대작곡가연맹 창립 10 주년 기념 작곡발표회>에 곡을 출품했다. 말하자면 주류 작곡가 대열에 끼인 것이다.

귀국 후 활발한 작곡활동을 펼쳤다. 정치 활동에 도 적극적이었다. 수준 높은 음악작품과 함께 해방 가요와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위한 노래도 적지 않 게 썼다. 해방이 되고 미군의 군정이 실시되면서 좌 익음악가로 분류되었다. 4412<1회 작곡발 표회>를 열고 가곡집 <산유화>를 발행하는 등 해방 공간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인 작곡가의 한사 람이었지만 분단과 그에 따른 이념적 갈등이 첨예하 게 대립하던 그 시기에 그가 설 땅은 좁았다. 그에게 는 체포령이 내려졌고 48년 그는 월북하였다.

처음은 좋았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창립대 표,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 등 정치적으로도 지 도적 위치였지만 해주음악전문학교 교수, 국립민족 예술극장 작곡가 등 대표적인 예술가의 지위를 역임 하였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1953년 반동음악가 라는 비판을 받기 시작하더니 58년 모든 공직을 박 탈당하고 창작의 권리도 제한되었다. 64년 복권되 었으나 별다른 창작활동이 알려지지 않았고 심지어 그의 사망연대도 확실치 않다.

남쪽에서는 김순남이 월북 이후 금지된 작곡가가 되어 그의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가 1988년 에 비로서 그의 작품이 해금되고 그의 가곡 등이 연 주되기 시작했다. 무려 40년 만의 복권이었는데 그 의 작품을 처음으로 만난 후배 작곡가들은 놀람과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그 정도의 기량을 가진 작곡 가가 40년 동안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도 놀라웠거 니와 월북 이후의 이렇다할 창작이 이루어지지 않 았다는 점도 아쉬웠다.

윤이상, 경남 산청 출생. 부모가 통영으로 이주하 여 통영에서 성장하였다. 이후 상경하여 상업학교 를 가라는 아버지의 권고를 뿌리치고 음악공부를 시작하였다. 일본 오사카 음악원에 입학하였고 잠 시 귀국하여 교편을 잡았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 가 작곡 공부를 계속하였다. 해방 후 가곡을 중심 으로 작곡활동을 시작했으며 1950년에 가곡집 <달 무리>를 출판하였다. 1953년 이후 상경하여 가곡 과 실내악곡 등 작곡활동을 벌이다가 1956년 유럽 으로 갔다. 처음 프랑스에 머물렀으나 1959년 다름 슈타트 현대음악제에서 주목을 받은 이후 독일에 정 착하였다. 1966년 관현악곡 예악이 도나우에싱겐 에서 초연되어 성공을 거둔 후 세계적인 명성을 얻 기 시작했다. 1967년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되어 한 국으로 강제송환되었다. 2년간 복역후 독일정부의 노력으로 풀려나 1969년 독일로 돌아갔다. 수감기 간 중에도 오페라 나비의 꿈을 완성했고 1972년에 는 뮌헨 올림픽을 기념하는 오페라 <심청>을 작곡하 여 성공을 거두었다.

윤이상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자 북한 정권은 그 를 평양으로 초청하기도 하는 등 좋은 관계를 유지 하였다. 평양에는 그의 이름을 딴 음악연구소가 세 워졌다. 이러한 그의 행보로 말미암아 남쪽 사회 및 음악계에서는 그의 음악이 정치적 환경에 따라 환영받기도 하고 금기시되기도 하는 등 부심이 있 었다. 그의 주된 근거지였던 독일에서는 세계적인 작곡가로서 영예로운 삶을 살았다. 독일연방공화 국 대공로훈장, 함부르크 자유예술원 공로상, 괴테 상 등을 수상하였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함부르 크와 베를린 아카데미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1988년 남북음악제전의 개최를 제의하였고 1990 10월 범민족통일음악제를 개최하여 남북한 합 동공연을 성사시켰다. 그는 1995년 독일에서 세상 을 떠났다.

백년 간의 한반도의 역사가 위 두 작곡가의 삶에 그대로 반영된다. 일본의 식민통치, 일본을 통한 새 로운 문물의 수입, 해방이후의 짧은 꽃피움, 분단, 전쟁과 분단의 고착화, 후진국의 현실, 유학, 남북의 정권과 그 밑에서 사는 예술가들....

참으로 어려운 시대를 살아간 두 사람이었다. 뜻 을 세우는 것도, 그 뜻을 제대로 관철하는 것도, 시 대가 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도 어려운 시대였 다. 다른 나라의 통치를 받아들여야 했고 동족끼리 전쟁을 치러야 했다. 전쟁은 또 얼마나 많은 위기를 만드는가, 그 위기는 우리를 얼마나 비굴하게도, 두 렵게도, 욕되게도 만드는가.

비록 윤이상이 옥고를 치르는 등 고생을 하였지 만 해방이후 남쪽에서의 70여 년은 굴곡은 있었으 나 전쟁은 없었고(휴전이었다.), 가난에서 출발했지 만 후에 발전을 했고, 독재정치가 있었으나 번번히 이를 뿌리칠 수 있었다. 금년에는 윤이상의 100주년 을 기리는 음악회도 적지 않게 열린다고 한다.

김순남, 월북 이후, 그리고 숙청 이후 그의 삶이 어 땠을지 짐작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지금 남아있는 것은 해방 공간에서의 작업 외에는 그의 창작적 열 정이 실현된 곡을 만날 수 없다. 아쉽다. 실의와 고 독에 가득찬 그의 마지막 날들이 보이는 듯하여 마 음이 아프다.

어떤 시대를 만나 어떻게 살아가는가? 운명과의 쉽지 않은 대화이다.